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단 편집) ==== 2기와 3선 불출마 선언 번복 ==== 대외적으로 미국의 팽창주의를 주도하고, 국내에서는 반독점법을 추진하면서 서민들 인기도 괜찮은 편이라 연임에 성공했다. 승계받은 대통령이 재선한 최초의 사례. 허나 그의 두 번째 임기 동안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07년에는 불황을 맞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 그의 지나친 기업 규제가 불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반대파들의 비난이 튀어나왔고[* 다만 상기했듯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노조에 대해서도 꽤 강경한 편이었다.], 불황의 여파로 의회가 돌아서면서 정치력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던 와중 그에겐 선택의 순간이 오는데.. 바로 '''3선 출마 여부'''였다. 원래 미국은 헌법에 연임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진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2선만 하고 물러난 이래 다른 후임 대통령들도 이를 본받아 최대 2선만 하고 물러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 관례를 깨고 2선 이상(4선)을 한게 시어도어의 친척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이다. 다만 FDR 사후 공화당 반발로 재선까지만 할 수 있다고 개헌하였기 때문에 이 조항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3선 이상의 대통령은 더 이상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독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절 3선 출마 여부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의 첫 임기가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닌 '''승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루스벨트가 자신의 '''두 번째 선거'''임을 주장하면서 3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전까지는 승계된 대통령으로서 재선한 사례가 없었다. 참고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제정된 현행 3선 이상 금지 조항은 부통령 승계자의 경우 잔여 임기가 2년 이상이면 온전한 1선으로 치고, 2년 이하면 3선 출마가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이런 구설수가 지속되는데에 부담을 느꼈던 그는 결국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은 없다'''라는 돌출 발언을 한다. 그러나 그는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3선 불출마 선언을 깨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1908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1912년 대선 출마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당을 깨고 나와서 신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는데,[* 후술하겠지만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 지고 이에 승복하지 못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분당했다.] 당장 자신과 지지자들은 좋을지 몰라도 당 입장에선 최악의 방법을 고른 셈이다. 사실 1908년 대선 당시만 해도 그는 후계자로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밀었고, 태프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심지어 이때만 해도 사이가 좋아서 시어도어는 윌리엄 태프트에게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과 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보내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자신의 정책적 철학과 측근들을 그대로 계승하리라 생각했지만, 태프트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자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의 비판이 이어지자 현직 대통령 태프트는 결국 루스벨트 재임 기간 중의 추문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루스벨트의 측근을 해고하기도 했다. 결국 태프트에게 앙심을 품게 된 루스벨트는 3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깨고 19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당내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태프트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게 되고 이에 루스벨트는 [[진보당(미국 1912년)|진보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여 공화당을 분열시켜버렸다. 그야말로 계파 갈등 시궁창 배틀이었다. 덕분에 분열된 공화당은 표가 나뉘어 버렸고, 1912년 대선은 [[어부지리]]격으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41.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득표율은 27.4%(412만표)로, 이는 공화당의 태프트(23.2%)를 능가하며 미국 대선에서 제3당 후보가 얻은 최다 득표이기도 하다. 물론 루스벨트의 모호한 성향을 봤을 때 당시 민주당 성향 표도 일부는 흡입되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윌슨의 재선 득표율은 49.2%였다.] 이때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 도중 [[윌리엄 매킨리]]의 [[암살]]을 루스벨트가 사주했다는 [[음모론]] 신봉자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참고로 정말로 천운으로 살아남았다. 연설 중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루스벨트는 곧 일어섰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평소에도 연설하는 걸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래서 연설문 종이가 정말로 두꺼웠다. '''그리고 총알이 그 두꺼운 종이에 맞은 것이다.''' 덕분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치명상 없이 살아남았고,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저격을 당했으나 살아남은 대통령'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때는 전(前) 대통령 때인 관계로, 이것도 보통은 [[로널드 레이건]]에게 붙는다.] 그의 치유를 기원하며 한동안 여야 모두 선거운동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